싱그러운 봄향기, 화사한 봄의 소리
- 노재명 (국악 음반 박물관 관장)
인간문화재 성우향 명창의 제자 원미혜,김경아,조정희,김문희가
옛날식 판소리 보성 춘향가를 공연한다.
춘삼월 광한루에 나들이 나갔다가 춘향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몽룡의 경우 처럼,
순수와 영정으로 뭉친 네 낭자의 화사한 판소리 무대는 만물이 생동하는 이 봄,
귀명창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리라.
화창한 봄날 마당 한켠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 맞으며 돋아나는 새싹을 바라보는 여유는
살아가면서 참으로 크나큰 행복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젊은 낭자들의 이러한 싱그러운 봄 향기 물씬 풍기는 춘향가 공연은
겨우내 움추렸던 심신에생기와 활력을 불어 넣어주기에 충분하며
또한 젊은 혈기의 패기있는 판소리에 목말라 하던 애호가들의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으리라.
성우향 인간문화재
오늘 무대에서 춘향가를 선사하는 원미혜(36세)는
그 보성소리의 원류가 되는 보성이 바로 고향이고
보성소리의 거장 성우향의 며느리이다.
일찍부터 성우향 명창의 춘향가와 심청가 사사를 주된 목표로 정하고
득음을 위해 힘껏 정진하고 있다.
김경아(31세)는 풍악의 전통이 강한 전북 임실 태생으로
성우향 명창의 문하에서 15년째 춘향가와 심청가를 익히고
독공을 통해 열심히 연마하고 있다.
조정희(27세)는 전남 순천에서 염금향 명창의 손녀로 태어나
10여년간 성우향 명창에게 춘향가와 심청가를 배웠다.
김문희(22세)는 서울 신림동 성우향 명창의 판소리 전수소 부근에서 태어나
10세 때부터 12년간 성우향 명창에게 춘향가와 심청가를 사사했다.
이 네명 모두 뛰어난 목구성을 타고 났고 대가 승승과의 인연, 부단한 노력을 겸비하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출세,성공과 같은 세속적인 욕구보다는 판소리 자체에 푹 빠져
여기에 꿈과 희망을 전부 쏟아 부으며 소리에 도취되어 청춘을 보내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어느 분야든 이같은 젊은이들이 어디 흔한가.
모든 것이 급변하고 유행에 민감하고 만사가 조급해져 가는 요즘 풍토에서
어릴 적 인연 맺은 어느 한분야, 일찍이 마음에 품은 목표를 향해
한 우물로 무던하게 파들어 가는 모습을 대하노라면 놀랍고도 무척 든든하가.
이들은 이같은 현 상황의 수평 평가가 아닌 수직으로 비교하여
예전 이동백,송만갑과 같은 5대 명창시절의 풍토와 견주어서
"판소리가 과거에 비해 이제 다 죽었다"라든가,
"예전 명창들에 비하면 요즘 소리꾼은 노력을 안한다"라든가 하는 비평은
너무 잔인한 말이 아닌가 한다.
판소리의 발전사를 더듬어 보면 명창, 고수의 노력과 더불어서
귀명창들의 관심과 헌신적인 뒷받침에 의해 판소리가 인간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극대치까지 번성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점에서 오늘 무대에 서는 젊은 이들과 같은 미래의 판소리를 이끌어 갈 명창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격려가 절실하다 하겠다.
이제 판소리는 우리나라만의 문화재가 아니라
전세계가 공인한 전인류의 문화 유산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세계의 예술문화 전문가, 애호가들이 판소리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판소리의 진수는 이러한 것이다 하고 자신있게 보여줄 수 있는 그 날까지
오직 득음을 향해 달릴 오늘 무대에 서는 네 낭자에게
자랑스러움과 고마움의 추심새를 보낸다.
김문희,조정희,김경아,원미혜가 춘향가 한바탕을
크게 사랑, 이별,우여곡절,상봉 부분으로 나누어 각기 한 단락씩 맡아 릴레이로 이어서
공연을 하고 마지막에 춘향가의 대단을 함께 부른다.
홀로 몇 시간 판소리 완창을 하는 형태도 물론 나름의 매력과 장점이 있으나
오늘 공연과 같은 방식 또한 상당히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각양각색의 여러 성음을 골고루 음미할 수 있다는 점, 소리꾼간에 자연스러운 경쟁심리가
작용되어 보다 양질의 소리 기량을 접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이들이 오늘 공연에서 선사하는 보성소리는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가운데
가장 인기있고 우아한, 기품있는 소리로 평가 받고 있다.
보성소리라 함은 명창 정응민이 젊은 시절 여러 대가들한테 물려받은 고형의 판소리를 집대성하고
평생을 연마하여 이루어낸 소리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를 보성소리라 하는 것은 정응민이 일찍이 중앙무대 활동을 중단하고
전남 보성에 은거하면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후학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면서 자연스레 생겨난 말이다.
정응민은 큰아버지인 정재근에게 박유전제 심청가,적벽가,수궁가 등을,
김찬업에게 김세종제 춘향가 등을 배웠다.
그리고 이동백과 송만갑에게도 소리를 배웠다.
이런 소리 내력을 가진 정응민은 스승으로부터 물려 받은 소리를
자신에게 맞게 고치고 집대성하여 보성소리를 탄생케 했다.
정응민 명창의 제자가 엄청나게 많은데 그 중에서도 수제자를 꼽자면
단연 성우향이 으뜸이라 할 것이다.
정응민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소리는 단가,춘향가,심청가,적벽가,수궁가이다.
홍보가는 재담소리라 하여 별로 입에 담지 않았다.
춘향가는 정응민의 그 여러 소리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성우향 만큼 이 보성소리 춘향가를 잘 부를 수 있는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우향 춘향가의 주된 원류는 김세종이다.
즉, 성우향의 스승 정응민이 김세종의 제자 이동백,김찬업에게 춘향가를 배웠는데
이는 아주 고형의 동편제라 할 수 있다.
김세종은 신재효의 지침을 받았고 장자백,김찬업,성민주,이동백,이선유,유성준,진채선,허금파와 같은
명창을 길러냈다.
김세종은 춘향가에 장기가 있었고
특히 김세종의 '천자뒤풀이'는 당대독보로 짝이 없이 잘했다 한다.
정응민이 완성한 보성소리 춘향가 가운데 김세종제라고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부분은
초입부터'퇴려 후 이도령이 춘향집으로 가는데'까지 이고
그 뒤로는 송만갑제가 상당히 많이 석여있다.
정응민은 송만갑에게 춘향가를 배울때 송만갑의 동편제외에도 경드름,반드름 또한 물려받아서
보성소리에는 경제 맛도 곳곳에 배여 있다.
그리고 정응민의 보성소리 춘향가의 한 특징은 이동백제가 많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판소리하는 것이 말 배우는 것과 같아서 대개 첫 스승의 음색과 어감을 많이 닮게 되고
처음 익힌 그러한 습관이 평생 따라 다니게 되는데
정응민의 첫 스승이 이동백이기에 보성소리 춘향가에 이동백의 그늘이 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정응민의 보성소리 춘향가는 김세종-김찬업-정응민이라는 단순한 구조의 계보만으로는
설명하긴 어렵고 그보다 훨씬 다양한 영향 관계에 의해 완성된 소리라 하겠다.
성우향이 처음 정응민을 찾아 갔을 때 정응민은 "서을가서 신식 소리 배우시오"
라고 하면 거절했다.
그래도 성우향은 정응민의 집에서 끈질기게 공부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정응민이 "소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여"라고 말한 후부터
성우향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정응민은 성우향에게 춘향가를 가르치면서
"이 소리는 조선 8명창의 한 분인 대명창 김세종 선생님 제이다.
동편제 소리로, 통성으로 우조를 주로 쓰니 단단히 각오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한다.
정응민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성우향에게 유언을 남겼다.
"소리를 변질시키는 것은 정절을 버리는 것과 같으니라.
절대로 소리를 만들지 말고 옛 것 그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한다.
이러한 정응민의 말에도 나타나 있듯이 보성소리는 정응민 당대에는
대중적인 소리라기 보다는 아주 오랜 기간 극도로 귀가 잘 훈련된
극히 일부 귀명창들의 취향에 적합한 명품소리,귀족적인 방안소리였다.
만일 정응민이 최고 수준에 이른
그러한 어전 소리를 꼿꼿한 정신으로 지켜내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린 그런 소리를 물려받지 못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래서 삶의 끝까지 중앙무대에 서서 시류의 변화에 적응하며
소리에 변화를 꾀한 송만갑의 말년 소리보다도
오히려 일찍 은거한 뒷세대 명창 정응민의 녹음이 더 고풍스럽고
어떤 면에선 정응민의 보성소리가 송만갑의 말년 소리보다
더 장중한 고형의 동편제 맛을 지니고 있다.
보성소리는 음악적 구성이 치밀하다.
그리고 사설이 매우 잘 다듬어져 있어서 아니리가 깔끔하다.
정응민은 목이 궂었으므로 다양한 붙임새를 개발하고 발전시켜 보성소리는 장단을 엇붙이는
잉어걸이,완자걸이 등의 기묘한 장단붙임이 쓰인다.
또한 혀자침,세우목,아구성 등의 성음이 자주 사용된다든지,
고제에서 쓰였던 빠른 장단인 세마치,
빠른 중모리,빠른 중중모리, 빠른 자진모리가 자주 쓰인다든지,
통성의 덜미소리로 소리를 들고 나가는 것 등이 보성소리의 특징이다.
정응민의 보성소리는 중후하고 기품있는 소리로 짜여져 있다.
춘향과 이도령이 몰래 사랑을 나는 것이 아니라
춘향모의 허락을 받고 나서 화촉을 밝힌다든가,
특히 춘향이가 오리정에 이별하러 나가서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통곡하는 것은
요조숙녀로서 옳지 않다 하여 오리정으로 전송가지 않고
춘향집 담장안에서 이별하는 것으로 소리를 짜고,
웅장하고 기품있는 성음으로 부는 것 등이 보성소리의 특징이다.
보성소리가 기품있는 쪽으로 발달된 이유는
그 소리제의 뿌리가 되는 바유전,김세종,정재근,김찬업,
그리고 그 소리제의 전승자들인 정응민,정권진 등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의젓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정응민이 흥보가를 재담소리라 하여 부르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러한 데 이유가 있고
보성소리 수궁가에 '상좌 다툼'이 없는 것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리고 보성소리 춘향가의 경우에는 다른 바디에 없는 '춘향모 탄식''이별가 초두 : 그 때에 향단이'
'이 돈이 웬돈인가','돈타령'.'춘향이 다짐 받는 데','어사또 밥 먹는 데',가 들어 있고
다른 바디에 있는 '이몽룡이 몽헌에 들리는데',
'도련님 먼저 오르시오','음시 차림','백구타령',''어사술상'이 보성소리에는 없다.
그리고 정응민과 성우향의 공통적인 면, 두드러지는 특징으로서는
소리 붙임을 억지로 꾸미지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공히 제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칠 때
어떤 일정한 틀에 똑같이 맞춰서 될 때까지 집요하게 복사판 소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즉, 각 개개인의 음색과 개성에 맞게 소리를 가르친다는 점,
소리에 생동감과 자연미를 불어 넣어 준다는 점이 돋보인다 하겠다.
녹음이 남아 잇는 역대 여류 명창 가운데 성우향 만큼 남성을 능가하는
웅장하고 큰 판소리를 구사한 이는 극히 드물다.
제대로 앵긴 성우향의 보성소리는 판소리를 업으로 하는 명창들에게조차
경이로움을 넘어서 때론 낯설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성우향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74년 심청가 공연 실황 녹음은 보성소리의 진수를 보여 주는데
특히 고음 통성으로 진행해 나가다가 곳곳에서 뿜어내는 멋들어진 아구성은
암수의 조화랄까, 건조함에 윤기를 주듯,
고기 반찬에 잘 익은 동치미 같은 시원하고 아주 후련한 맛을 준다.
꼭 들어가야만 하는 성음이다. 바로 이러한 아구성과 같은 고제 창법이
보성소리의 핵심요소이고 진정한 멋이라 할 수 있다.
2005.3.4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리는 원미혜, 김경아, 조정희,김문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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